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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2003-09-27 00:41:00
작성자 : 김태황   조회 2,111, 추천 281


내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7년경 빠리 유학시절이었다.
엄밀하게는 당시 나의 관심은 기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였다.
대다수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려운 여건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싶었다.
한 선배에게서 불교 서적 서너 권을 빌려 읽었다.
법화경 언해나 미륵경의 세계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당시 나는 불교의 세계에서는 본인 스스로가 참된 도(진리)을 깨우치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득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이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당장 하루하루 언어장벽과 타지생활의 어려움을 견뎌 나아가기도 힘든 상황인데,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론보다 실제 생활에서 관찰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빠리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종교시설물은 예배당이므로, 한인교회를 찾았다.
몇 번 예배에 참석해 보니, 참으로 가소롭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을 종속시키는 "꼴"이 참으로 안타까왔다.
그래서 '역사적인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 우매한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출해 내겠다고...
당시 나로서는 진지한 결심이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정면 승부를 자청한 것이었다.
나의 공격 목표가 된 빠리한인침례교회는 유학생 선교를 지향하면서
1985년 목사님 가족을 포함하여 5~6명이 창립한 신생 교회였다.
나는 목사님과 청년부 성경공부, 수련회 성경공부에 열심으로 참석해서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악역을 진지하게 실행했다.
1987년 12월 30일 송구영신을 겸한 수양회에서 모두들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간증도 하고 개인 경험이나 의견을 얘기해 보자는 조별 모임에서
나는 하나님의 존재도 증명되지 않았는데 기도의 응답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런 식으로 사람을 현혹해서는 안된다는 어조로 반박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로서는 나는 심각한 태도로 정면으로 공격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가 도로 잡히게 된 것은
1988년 3월 유럽유학생 수양회를 통해서 였다.
하나님께서 실존하시고 전능하시다면 그리고 나에게 그 실체를 보여주시면
나도 정정당당하게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지만,
내가 감지하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가 완전히 변화한 것이었다.
내가 인식하고 인식하지 않고는 전혀 무관하게 이미 나의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실체를 순간적으로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환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 나의 인식 태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자유사상가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에 행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제목의 강연(1999년 사회평론에서 한글 번역)에서
"인간의 정서적 발전, 형법의 개선,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라고 교회를 비판했으며,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은 두려움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님은 당시 주위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 자신이 재림할 것으로 믿었던,
결코 현명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옥의 저주를 퍼부을 만큼 자비심이 결여되었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러셀에 비하면, 나는 초라한 졸부에 불과할 지 모르나, 나는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긍심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한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매일매일 운전하면서 교통 혼잡을 경험할 때도,
나의 계획대로 연구활동을 진행시키지 못할 때도,
나는 마음을 평안하게 다스리지 못하기 쉽다.
궁극적으로, 나는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나 스스로가 통제하거나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다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생명력을 발견했기 때문에 20대 중반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것은 지금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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