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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하나님, 공감의 경제학 5 : 하나님을 긴장시키는 경제성장 2015-03-30 19:26:26
작성자 : 김태황   조회 1,168, 추천 151


* 아래 글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에서 월간지로 발간하는 <월드뷰(Worldview)> 2015년 4월호(pp.41-43)에 게재한 글의 全文이며,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홈페이지 www.worldview.or.kr <월드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감의 하나님, 공감의 경제학>

5. 하나님을 긴장시키는 경제성장

(1)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이 53년만에 22배 증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한다. 잘 사는 집에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세계 최강의 경제력이 소용돌이치는 뉴욕 맨해튼은 세계 70억 명이 한 번이라도 밟아 보고 싶어 하는 땅이다. 가정과 국가의 생활수준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적, 의식적, 윤리적, 전통 문화적, 사회관계적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므로 속단하기는 어렵다. 2013년 1인당 국민소득이 2.330달러에 불과한 부탄(Bhutan) 국민의 주관적 행복 인지 수준이 세계 1위라고 하여 객관적인 생활수준이 높다고 동의하기도 어렵다. 경제적 관점에서 생활수준은 얼마나 생산할 수 있고 소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세계은행(IBRD) 자료에 의하면 1960년 이후 세계경제는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60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당시 가격(경상가격)으로 156달러였고 일본과 미국의 경우에는 각각 479달러와 3,007달러였다. 영국은 1,380달러, 아르헨티나는 1,148달러(1962년 기준), 중국과 필리핀은 각각 89달러와 254달러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5.2%, 아르헨티나의 13.6%, 필리핀의 61.4% 수준에 불과했다. 201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53년 만에 25,977달러(세계 평균 10,679달러)로 증가하였는데 물가 상승분을 제외한 불변가격 기준(2005년)으로 보더라도 실질적으로 21.6배가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일본, 영국, 미국이 각각 5.3배, 3.0배, 2.9배 증가한 것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괄목할만한 소득 증대를 달성했다. 필리핀은 2.3배 증가한 반면에 중국은 무려 29.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인당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보면 2013년 현재 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은 미국의 절반 수준으로 따라잡았고 아르헨티나와 필리핀에 대해서는 오히려 역전하여 각각 1.8배와 9.4배 수준이 되었다(그림 참조).

주요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추이
<그래프 삽입>

  한 나라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가 1인당 국민소득(GNI)이다. 과거에는 주로 1인당 국내총생산을 활용하였으나 최근에는 자국민 중심으로 실질적인 소득 수준을 반영하는(이를테면 환율의 변동을 고려한) 국민소득으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생활수준이 향상되려면 경제가 성장해야 하므로 각 국가는 경제성장률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고, 경제성장률은 주어진 기간 동안 국내총생산이 얼마나 증감했느냐를 산출하여 계산한다.
  현재 생활수준이 동일한 갑, 을 두 나라가 각각 매년 6.0%와 1.6%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두 나라 사이의 경제성장률 격차는 불과 4.4%포인트에 불과하지만 50년 후 갑의 생활수준은 을의 8.3배가 되고 70년 후면 19.4배로 급속도로 확대된다. 올해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주년이 되므로 만일 그 동안 갑, 을과 유사한 나라가 있었다면 그 동안 생활수준의 차이는 현격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그랬다. 1960-2013년 우리나라는 연평균 6.0%, 필리핀은 1.6%의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 그 결과 1960년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의 1.6배였던 필리핀은 2013년에는 우리나라의 10.6%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필리핀도 실질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장세가 가속화되면서 상대적 생활수준이 현격하게 뒤바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 첫 부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복을 주신 것은 ‘잘 살아보세’에 대한 염원이 우리보다도 하나님께 먼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누구나 다 잘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께서도 후원(!)하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불과 몇 십 년 만에도 이토록 큰 격차가 나타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는 것일까?

(2) 어찌하오리까?

  경제성장의 촉진제는 부가가치와 생산성의 향상이다. 경제성장률은 부가가치의 증가율이고 부가가치는 생산성의 향상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경제성장률을 높이려면 부가가치(개인의 임금소득, 사업자의 이윤, 토지와 건물 소유자의 지대수익)가 증가하는 경제활동이 많아져야 한다. 상품과 서비스의 혁신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증대시키거나, 숙련도 또는 핵심 역량이 향상되어 임금이 상승하거나, 토지와 건물의 자산 가치가 상승하여 소유자의 소득이 증가한다면 부가가치가 높아지게 된다. 부가가치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가격이 비싼 것은 아니며 특정 첨단 산업이나 상품/서비스 부문에 편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친환경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신선한 미나리가 저가의 재배 비용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다. 크고 작은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것은 커피 판매가 전형적인 고부가가치 사업이기 때문이다. 일부 골동품이나 미술 작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대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다. 부가가치 창출의 극단적인 사례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이다. 창조 기간이 오늘날과 동일한 엿새 동안인지 실질적으로 수 십 억년이었는지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한대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신 것이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면 새로운 기술이나 기계를 도입하거나 창의적인 생산방법을 적용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계산기를 두드릴 때와 컴퓨터를 활용할 때의 생산성은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농부는 농한기 없이 연중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창 1:26),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창 2:7) 사람은 본능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활동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땅과 바다와 하늘에 제 멋대로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시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DNA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현시켜 나아가는 지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재미가 쏠쏠하심에 틀림없다. 우리의 경제활동이 성장하고 생활수준이 나아지는 것은 나무가 자라듯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생산성을 높이고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경제활동이 기대하는 만큼 늘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비록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100년 이상 존속되어 온 기업은 두산(1896년 창립), 동화약품(1897년 창립), 몽고간장(1905년 창립) 뿐이다. 한국은행의 조사(2008년 5월)에 따르면 우리 기업의 창립 1년 후 생존율은 60%, 3년 후와 5년 후는 각각 40%와 15% 수준이며 10년 후와 50년 후는 5%와 0.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기업의 수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대나무 줄기처럼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 환경 변화에 순발력 있게 적응하기 위해 오히려 성장을 절제하거나 기업 자체를 포기하는 전략적 선택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삼성그룹이 삼성자동차에 미련을 두어 투자 재원을 늘였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컸을 것이다. 경제활동의 성장의 이면에 위축 또는 파산의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성장의 나침반

  생육하여 번성하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인류를 진멸시키신 사건은 참으로 황당하고 헷갈린다. 인류는 땅이 표출해내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창 3:18)를 극복하며 일상의 먹거리를 챙기는 일만으로도 그야말로 땀을 흘리는 수고인데 번성해야 하는 부담도 여전히 짊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DNA를 타고난 사람은 창의성과 공감을 발휘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부가가치를 높이며 번성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번성하기 이전인 노아시대 사람들은 이미 번성하기에 성공했다. 일상에서 여유가 생기고 땀 흘리기 이외의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창 6:1)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창 6:5)하게 되었으니 “번성”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아님을 우리의 까마득한 선배들은 아마도 간과한 것 같다.
  ‘번성하다’(창 1:22, 28)의 히브리어 라바(rabah)는 일정한 기준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즉 ‘증가하다’의 뜻을 포함한다. 다분히 질적인 발전의 의미보다는 양적인 성장의 의미가 더 강해 보인다.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창 26:13) 되었을 때의 ‘창대하다’(가달, gadal)는 ‘커지고 강해지다’의 의미로 영향력이 증대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창세기(1:22, 1:26, 9:27, 12:2, 26:13)와 욥기(8:7)에 기록된 ‘번성하다’(rabah) 또는 ‘창대하다’(gadal, patah, sagah)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양적으로 증대되거나 질적으로 강력해지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번성’과 ‘창대’의 방향성이다. 즉 무엇을 추구하면서 번성하고 창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간과하거나 곡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노아시대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여 홍수로 진멸된 것이 아니다. 번성의 전리품(!)으로 죄악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어 소통과 공감의 형성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시혜하신 바인데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으신 것은 그들이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창 11:4) 내걸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공감할 수 없는 가치관을 펼치려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땀 흘리며 수고할 때는 딴 마음을 가질 겨를이 없었지만 번성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DNA를 물려받았다는 자기 정체성과 하나님 앞에 선 긴장감을 소홀히 여기는 전과기록을 씻어내지 못하는 습성이 남아있는 듯하다.
  경제성장에도 나침반이 필요하다. 경제활동에 가치관과 세계관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라 하더라도 각 국은 경제성장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경제정책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5대 국정목표 가운데 최우선적인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는 경제성장의 방향성이 일자리 창출로 향해 있으며 이를 통해 소득과 복지 수준을 높여가자는 것이다. 자율성과 책임성과 상생의식에 근거한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국정목표를 달성하려면 무수한 변수들을 고려해야겠지만 이해하고 공감하고 신뢰하는 국민들의 실질적인 경제활동 참여가 가장 중요하다. 마치 대통령을 비롯한 소수 지도자들이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오인하지만 하나님의 나침반은 국민들에게 있다. 지도자들은 나침반의 눈금을 읽고 해석할 뿐이다. 스스로 독점하려는 순간부터 전제군주 또는 독재가가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 동원된 종(從)일 뿐이었다. 모세의 지팡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나침반이지 모세의 장신구가 아니었지 않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백성들이 독일어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나침반을 찾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었는가?

(4) 경제성장과 창조의 섭리

  키가 크고 몸무게가 커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칫하면 체력 부실이나 비만으로 환자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성장의 속도와 덩치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본질적이다. 경제성장 즉 생활수준의 결과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경제성장은 자칫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15세기부터 수 세기동안 확장시킨,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구 열강들이 인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 남미 국가들에 대한 식민주의적 수탈은 잘못된 성장 방식이었다. 아프리카 백성들을 노예로 사들여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미국을 건설한 18, 19세기의 역사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노예상인들만의 짓이 아니었다.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인 일본과 독일 히틀러 정권의 성장 나침반은 노아홍수 이후 최악의 재앙을 초래했다. 2007년 미국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 피라미드와 다름없는 돈놀이의 자충수를 둔 결과였다. 이와 같이 일그러진 경제성장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땅과 온 백성들에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 십 년, 수 백 년 동안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보다 나은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부합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동식물과 자연환경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번성해야 한다. 동식물과 자연환경이 유지될 수 없는 방향으로 사람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이 공감하실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성장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돈을 많이 벌려고 하고 잘 살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부가가치를 높이고 싶어도 이를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동조하는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경제활동은 언제나 쌍방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산성을 높이고 싶어도 나의 역량과 노력과 수고를 인정해 주는 내부 구성원과 외부 시장 환경이 있어야 한다. 공감할 수 없는 성장은 기형이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이며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실행위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명지대와 하와이 열방대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크리스천최고경영자과정(C-LAMP)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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