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980년 이후 최고조의 극심한 사회적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저출생 고령화의 영향으로 저성장의 늪에 빠져든다는 우려감도 증폭되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적 관세정책은 글로벌 통상체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1947년부터 발효되어 온 무차별주의(non-discrimination) 무역 자유화의 통상규범이 와해 위기에 직면했다. 2012년 개봉영화 “설국열차”는 총체적 위기 가운데 양극화된 불평등과 갈등으로 인류 마지막 열차가 공동 자멸에 이르는 종말을 상상했다.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면 개인을 집단적 광기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 개인들이 사회적 집단을 구성하고 운영하지만, 역으로 집단의 관성력과 가속력이 구성원들을 압도하게 된다. 이럴 땐 시선과 생각의 전략적 이탈과 전환이 필요하다. 개인에게는 타성적인 일상의 탈출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의 재발견이 될 수도 있다.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어다 놓기 시작했다. 나는 봤다. 베란다 난간과 냉방기 실외기 사이이다. 보금자리를 지으려나 보다.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자율선택을 지켜볼 것인지, 희망고문을 조기에 차단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싶은데 우리 식구는 아무도 비둘기가 되어본 적도 없고, 소통해 본 적도 없다. 이 녀석들이 두어 달 후 실외기 더운 바람을 견뎌내겠다고? 완전 새네, 새. 그런데 우리는 실기했다. 우리가 망설이는 사이 그들이 선수를 쳤다. 울타리만 친 듯한 허술한 둥지에 알을 낳았다. 초조했나 보다. 철판 바닥에서 알이 부화가 될까? 계절의 변화는 나보다 저들이 더 잘 안다. 어쩌면 봄비 내릴 때 둥지를 철거해야겠다는 내 속내를 저들이 이미 간파하고,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새끼들은 날개를 펼 것이 틀림없다.
바람과 몸을 섞는 존재는 모두 예지력을 가진다. 비둘기와 가마우지와 기러기는 한 달 후 머무를 곳을 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코스모스는 바람의 때에 맞추어 색깔을 준비한다. 같은 곳 같은 색깔이라 하더라도 같은 바람은 아니다. 아니 바람이 부추겨서 같은 곳을 다른 곳으로, 같은 색깔을 다른 색깔로 느끼도록 기억의 코드를 흩어놓았다. 지겨움 없이 예지력만 사용하면 된다.
나는 오늘 옷을 입고 내일 옷은 생각하지 않는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달력을 탁자에 세워두고 오늘을 산다. 사실 달력은 살아가는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살고 싶어하는 날을 생각하도록 도와주기는 한다. 정작 그 날이 되어 살아가면 나도 달력도 아는 척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언제나 내일을 위해 내일을 향해 살아간다지만 내일은 언제나 빗나간다. 한두 번이 아니므로 난감하지도 않다.
비둘기는 알을 낳았는데 나는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비가 왔는데 나의 반가움의 크기만큼 비둘기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와 비둘기는 비의 역할에 대해 상이한 관점과 견해를 견지하고 있었다. 각자의 경험과 판단을 스스로 믿고 있었다. 나의 언어 능력은 비둘기의 날개 감각에 대적할 수 없었다.
비둘기는 실외기 옆 좁은 공간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베란다 난간을 몇 번 기웃거리면서 간파했다면, 세상을 무수히 기웃거린 나는 뭐지? 수십 년 동안 현관문을 나서서 땅을 들여다 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는데. 날개가 없다고 설마 내가 비둘기보다 못하려고. 물론 비둘기는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보다 높은 곳으로 통행할 수 있으니까. 올려다 보는 것보다 내려다 보는 것이 주도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열린 공간에는 공간이 없다. 틈이 있어야 공간이 생긴다. 내가 차지할 공간은 좁아야 한다. 내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공간을 찾는 본능이 없다. 그러므로 엄밀하게는 내가 공간을 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공멸의 국내외적 갈등을 넘어 새로운 전환의 시대로 나아갈 둥지를 준비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하기 1년 전인 1944년 이미 44개국이 모여 전후 복구와 무역과 통화체제 안정화를 위한 브래튼우즈 체제를 합의했다. 우리는 눈과 생각을 돌려 새롭게 세상을 관찰하고 궁리해야 할 시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