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개최하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주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이다. 핵심 가치는 연결, 혁신, 번영이다. 1989년 창립된 APEC이 추구하는 목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번영을 지원하는 것이다. 제32차 정상회의는 10월 30일부터 이틀간 진행되지만 15개에 이르는 장관급 및 고위급 대화는 연초부터 여러 차례 진행해 왔다. 연간 총 200여 개의 각종 논의를 통해 APEC은 참여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가?
APEC의 두드러진 특성은 ‘개방적 지역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역주의란 역내 회원국끼리 역외국에 대해 배타적 이익을 증대하기 위한 경제 협력 또는 통합 방식이다. 엄밀하게는 지역주의의와 개방성은 상반되는 특성을 내포한다. 마치 구심력을 높이면서 원심력도 높이겠다는 주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APEC은 정상(Leaders) 선언문은 있어도 협정문은 없다. APEC은 느슨한 지역주의를 표방한다.
1989년 호크 호주 수상이 한국 방문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제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APEC 창립을 주창했던 1989년 상황과 러시아가 가입한 1998년 상황은 2017년 트럼프 행정부 이후의 상황과 지정학적으로 크게 달라졌다. 지난 35년간 APEC도 꿈틀거리는 용솟음을 시도해 왔다. APEC의 헌장과 같은 1994년 보고르선언을 통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무역과 투자’를 실현하자는 목표를 설정했다. 2016년 리마선언에서는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구현하자는 로드맵을 발표했고, 2020년엔 푸트라자야 비전 2040을 통해 세 가지 목표를 선언했다. 무역과 투자 자유화, 혁신과 디지털 경제, 포용적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이번 APEC 경주의 핵심 가치는 푸트라자야 비전의 맞춤형과도 같다.
2018년과 2019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정상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부분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와 회원국들이 직면한 식량, 에너지, 사회적 이슈 등을 ‘거룩한’ 수준에서 선언했다. 지난해 마추미추 선언의 경우에도 선언문 각 조항의 주요 동사는 “환영한다”, “재확인한다”, “인식한다”이었고, “약속한다(commit)”는 동사는 12조에서 서비스 부문의 경쟁력 촉진에 한번 사용되었다. 이 또한 이행이나 실효성이 뒷받침되지는 않았다.
이번 APEC 경주의 개최는 전 세계의 관심사이다. 미중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깜짝 이벤트의 성사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 국민도 APEC의 역할보다는 한미 관세 투자 협상의 타결 여부에 더 촉각을 세우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도 포함된다. APEC은 21개 회원국의 경제 협력체이지만 주요국의 양자회담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끌고 가는 듯하다. 구조적 한계를 넘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발달장애를 겪고 있다. 우리나라로서는 자국 우선주의에 함몰된 틀의 변화 계기를 모색해야 하는 개최국으로서의 책임과 리더십 발휘가 절실한데 빛 좋은 개살구로 잔칫상을 차리는 수고를 기울여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2025 APEC의 주요 구상이자 추진 계획으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고려했다. 보고르선언, 리마선언, 푸트라자야 비전을 잇는 경주선언으로 무역과 투자 자유화의 한 축을 세우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은 개별 국가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 협력체의 구도도 흔들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가 함께 회원국인 APEC에서 자유무역의 기조가 실행되기를 기대하기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는 통상 환경에서 중국, 러시아, 미국 리스크를 포함한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를 완화시킬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구속력이 없고 합의제(consensus) 의사결정의 APEC에 주도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APEC의 발달장애를 구조적으로 극복할 방안으로 나아가야 한다.
협력체로서의 APEC 프레임워크에 국한되지 않는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협정(FTAAP)을 재추진할 필요가 있다. 전례가 없던 협정 추진이므로 협정 내용 구성을 통해 미국과 러시아의 불참을 유도할 수 있다. 이는 중국까지도 제외되는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보완적 역할을 할 것이다. 한미 경제동맹은 양자협정으로 강화해 나아가고 글로벌 리스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통상협정을 통해 완충과 숨구멍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