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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환경칼럼 26> 캘리포니아 산불이 밝히는 Eco-Vision 2020-12-02 23:01:07
작성자 : 김태황   조회 176, 추천 12


* 아래 글은 월간지 <ECOVISION 21>(www.ecovision21.com)에 격월 정기적으로 게재하는 <국제환경이슈>로써 2020년 12월호 pp.60-61에 실은 전문(全文)을 옮긴 것이다.

캘리포니아 산불이 밝히는 Eco-Vision

‘자연보호’에 대한 그럴듯한 오해가 있다. 우리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은 엄밀하게는 절반의 진실이다. 자연보호를 외치는 주체도 인간이지만 자연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주범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인가?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으로부터이다. 자연재해는 자연에서 비롯된 재해라고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재해이지 자연의 입장에서는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자연적인 변화 과정이다. 자연재해가 결과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게 된다 하더라도 자연이 자연을 공격하여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려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려는 행위와 대적하는 것이다. 보호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행위이다. 인간이 자연보다 강자가 아니라면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섣불리 대들지 않도록 자제하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행위를 혹 “자연보호”라고 으스대는 것은 아닐까?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와 인근 주에서 올해 8월부터 시작된 산불은 석 달 동안이나 지속되어 무려 8,300여건 이상 발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면적의 약 1/5 규모에 이르는 방대한 삼림을 태웠다. 캘리포니아주 역대 최대 규모였던 2018년 산불 피해 면적의 2.5배에 이른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산불에 모든 생명체가 소실된 와중에도 건재하며 오히려 번식의 기회로 활용하는 나무가 있다. 높이가 약 80미터에 이르는 자이언트 세콰이어이다. 나무껍질은 두껍고 단단하며 가지들은 밑둥치에서 수십 미터 위에서부터 뻗어 나오기 때문에 산불에도 거뜬히 견디어낸다. 견고한 껍질에 쌓인 씨앗은 동물에게 먹히기도 어렵고 저절로 발아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산불에 그슬리면서 한결 수월하게 발아하게 된다. 세콰이어의 성장을 가로막으며 우거졌던 잡목들은 한꺼번에 소실된다. 적어도 자이언트 세콰이어에게는 산불이 화마(火魔)가 아니라 종족 번식의 은인이 되는 셈이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 자이언트 세콰이어 숲 인근에 리조트가 개발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자연 발생적인 산불 발생이 감소했고 그 결과 세콰이어의 번식력은 현저히 약화된 적이 있었다. 마침내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은 통제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의도적으로 산불을 발생시킴으로써(!) 세콰이어의 번식을 유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불은 생태계의 파괴자일 수도 있지만 수호자일 수도 있는 사례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불을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예방하고 최소화해야 한다. 주목할 점은 자연의 대응 움직임과 흐름이다. 자연은 파괴의 과정에서도 새로운 탄생을 이어간다. 모든 나무가 자이언트 세콰이어처럼 껍질이 두껍거나 키가 큰 것은 아니어서 대부분 산불에 소실된다. 그러나 잿더미에서 발아된 싹이 다시 나무와 숲을 이루도록 자연은 움직인다. 이전과 다른 종자가 유입되기도 한다. 혈통주의를 고집하는 인간과는 달리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흐름을 창출한다.

자연을 보호해야 할 점은 바로 이러한 움직임과 흐름이다. 인간의 관점과 평가 기준으로는 이러한 흐름이 못마땅하거나 더디거나 가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을 복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움직이고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본질인데 인간의 가치관에 따라 자연을 묶어두려는 것은 자연보호가 아니라 ‘자연감금’이다.

온 세계가 기후변화의 심화와 온실가스 배출 증대의 위험을 외치면서 인간 중심적 사고와 방식에 몰두해 있다. 우리가 합의한 방식과 내용이라고 해서 자연의 움직임과 흐름에 합당한 것인지는 속단할 수 없다. 이를테면 탄소 배출을 줄인다면서 해양 풍력 발전소를 대량 건설하는 것은 해양 생태계의 흐름에는 모순적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인간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과 흐름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이는 자연보호가 아니라 인간보호일 따름이다.

때로는 자연의 움직임과 흐름이 인간에게 아픔이 될 수도 있다. 자연을 중단시키기보다는 인간이 견뎌내야 한다. 산불로 소실된 삼림과 자산은 아픔이지만 새로운 세콰이이어 숲은 또 다른 자연적 시작이다.

“악마의 바람”을 타고 확산된 캘리포니아 산불은 악마처럼 엄청난 재해를 일으켰다. 아무도 예측하거나 예방하지 못한 자연재해였다. 그렇지만 잔해의 대지는 새로운 삼림을 설계하고 배양할 것이다. 마치 산불을 이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변모할 것이다. 비록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자연은 자연다움의 탄력성을 발휘한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왜소할 뿐만 아니라 조급하고 경직된 존재이다. 인간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자연을 보호하려는 순진한 생각과 열정에 충실한 편이다. 자연을 보호해야 할 상대는 바로 우리 인간이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운동력과 회복력을 본성으로 내포하고 있다. 산불을 통해 우리는 자연 스스로가 미래의 생태계를 창출하려는 몸부림을 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불이 자신의 주거지를 불태우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파괴적 회복이 아닐까?

김태황/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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